“이 땅과 현실에 터한 기독교 출판 지향해”

◇ 『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 번역한 설요한 IVP 편집자
◇ 『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 번역한 설요한 IVP 편집자

 

   제임스 K.A. 스미스 교수는 한국 교계에서 문화 예전 시리즈로 화제를 모았던 저자이자, “현실 속에서 초월을 보는 특별한 감각”을 기르는 기독교를 제안한 저자이다. 제임스 스미스의 화제작이 나올 수 있었던 데에는 IVP(대표 정모세) 및 제임스 스미스 교수의 <문화적 예전 시리즈>를 편집한 설요한 편집자의 역할이 컸다.

   설요한 편집자는 절판된 『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도서출판100, 대표 김지호)을 최근 재번역했다. 이 작품은 기독교계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연구서로 탁월한 평가를 받는 저서였지만, 오랜 기간 절판 상태였다. 설요한 편집자는 이 저작을 “제임스 스미스의 작품 여정에서 전환점이 된 핵심 저작”이라고 설명한다. “현재에도 여전히 제임스 스미스의 논의가 유의미하다”라고 말하는 설요한 편집자를 홍대입구 IVP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제임스 스미스에 대해 자의반 타의반 전문가로도 유명하다. 어떻게 스미스의 책을 편집하게 되었나?

   제임스 스미스의 책을 편집한 배경은 간단하다. 편집 의뢰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미국 복음주의권에서 인기가 많은 저자였기 때문에 당연히 한국 IVP에서도 관심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1970년생으로 비교적 젊은 저자이고, 학문 배경도 나름대로 탄탄하고, 필치도 매력적이고, 무엇보다 생산력이 좋기 때문에 여러 출판사의 출간 후보군에 올라 있었을 것이다.

   스미스의 책(『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을 편집하기 전부터 그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이미 한국어로 번역된 책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그가 쓴 글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관심을 두고 있던 저자였다. 나는 개혁파 신앙 배경을 갖고 있다. 스미스 역시 개혁파 배경을 두고 활동하는 저자였기에 정서적으로도 편하게 접근했다. 그리고 그의 책을 직접 편집하면서 그를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원고를 몇 차례씩 교정하면서, 때로는 원서를 살피면서 서술의 뉘앙스를 느끼려 했기 때문에 나타난 자연스러운 결과다.

 

◇ 제임스 스미스의 문화적 예전시리즈 3부작
◇ 제임스 스미스의 <문화적 예전시리즈> 3부작

 

   스미스는 비교적 보수적인 신앙 배경에서 성장했지만, 그 정서를 이해하면서도 개혁파 신학과 프랑스 철학을 가미해 신앙을 고민하고 확장해 나갔기에 매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개혁파 안에 있지만 동시에 개혁파라는 교파성에서 벗어나, 즉 자신의 외연을 계속해서 넓히면서도 결국 기독교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넓이와 깊이 면에서 그에 비해 한참 모자라지만, 그의 이런 여정은 내가 개인적으로 신앙과 관련하여 지니던 문제의식과 연결된다. 나는 장로교인으로 나고 자라 비교적 보수적 신앙의 문법에 익숙했는데, 막상 성인이 되고서(그 나름의 정합성을 갖추고 있던) 여러 교파의 입장을 접하게 되면서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는 교파의 전통이나 신조를 이해할 때는 시대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에 대한 이해 없이 교파주의의 발로로 인해 ‘우리의 고백이 진리다’라는 주장이 횡행하는 것 같았다. 요컨대, 진리 주장의 확실성을 두고 고민했다고 할 수 있다. 스미스는 그리스도인이지만 교파 편향적이지 않다. 그는 오순절의 정서도, 개혁파의 정서도, 전통의 정서도 긍정하는 듯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느슨하게 생각하기보다는, 각 교파 안에 있는 ‘기독교적인 것’, 즉 공교회적인 것을 추구한다. 아무튼, 내 상황 안에서 신앙을 고민하던 가운데 스미스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면서 그에게 매력을 느끼게 됐고, 그의 작품들을 편집하면서 그의 지향과 필치 때문에 그 매력이 배가되었다.

 

   번역이 말끔하고, 막히는 부분 없이 쉽게 읽힌다. 절판된 책의 번역 방향과는 어떤 부분이 달라졌는지?

   정말 그런가? 그렇다면 감사하다. 내가 하는 일(편집)의 성격상, 나는 늘 저자나 옮긴이에 대해 감사함과 아쉬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끼는데, 때로는 억척스러울 정도로 타인의 작업물에 개입하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번역을 맡게 되었으니 당연히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이 책이 잘 읽힌다면, 이는 도서출판100 김지호 대표의 수고가 많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존 한국어판을 재밌게 읽었던 사람으로서, 후발 주자로서 같은 책을 다른 한국어로 표현하는 일은 유리함과 부담감을 동시에 지니는 일이다. 번역하면서 이전 책은 어떻게 옮겼는지 많이 참고했으며, 그럴 때마다 앞서 말한 고약한 편집자 성향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내가 심판대에 스스로의 작업물을 올려놓는 일을 하고 있으니 양가적인 느낌이 드는 것이다. 어쨌든, 후발 주자로서 유리한 상황에서 번역을 시작했고, 그러한 유리함을 결과로 도출하고자 노력했다.

   기존 한국어판에 실린 서문은 원서의 내용을 보완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 글에서 근대성(modernity), 탈근대성(postmodernity),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개념을 더 명확히 설명하기 때문이다. 이번 새 한국어판 서문은 구 한국어판 서문과 골자는 같으며, 2019년 이후의 경험을 추가했다. 하나는 2019년 한국 방문, 또 하나는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이다. 내용 이해에 의미가 있을 정도의 지식이 추가된 것은 아니었지만, 원서 출간 당시 자신의 문제의식에서 결여된 부분(근대성 이면의 비인간화 구조를 인종 문제와 연결하여 생각하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 반성하는 내용이 있다는 점에서 작은 의미가 있다. 물론 스미스가 말은 이렇게 해도, 사실 『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 마지막 장에서 신체성과 지역성에 관해 서술하며 교회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곳의 문제에 명확하게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점을 표명함으로써 자신의 이후 관심사를 포괄하는 생각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면에 깔린 생각을 ‘더 명시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기에 이 점을 아쉬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스미스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왕을 기다리며』라는 책 마지막 장에서 어느 정도 서술하고 있다.

 

◇ 제임스 스미스, 『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구판)
◇ 제임스 스미스, 『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구판)

 

   이 책은 제임스 스미스의 작품 여정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책인가?

   이 책은 3부작의 기반이 된, 비교적 초기작이다. 다만 완전히 초기작은 아니고, 초기에서 중기(여전히 젊지만)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쓰인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학문적 서술에서 대중적 서술로 문제가 변했다고나 할까. 혹은 학자 스미스에서 작가 스미스로 변모했다고나 할까.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스미스에게 신학자 성격이 많이 가미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주제가 기독교이기 때문에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다. 아무튼, 기독교 신앙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어느 정도 정한 가운데, 학문적 글쓰기와 대중적 글쓰기를 융합하고, 프랑스 철학과 근원적 정통주의(radical orthodoxy, 급진정통주의)를 연결하고, 아우구스티누스 이해를 공교회적 신앙의 모판으로 삼았다. 이 책 5장(“적용된 근원적 정통주의: 이머징 교회를 위한 제안”)에는 스미스의 지향점이 나타나 있다. 이후에 나온 문화적 예전 시리즈 3부작(『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 『왕을 기다리며』, 특히 그중 1권)의 문제의식이 여기에 많이 담겨 있다.

 

◇ 제임스 스미스, 『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개정판)

 

   그간 교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취급할 때, 받아들이기보다는 배척하는 인상을 많이 받았다. 이 책이 처음 한국에 번역됐던 시기(2009)에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을 다뤘던 상황과, 지금 상황에서 다루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다룬다는 의미는?

   이른바 ‘교계’, ‘한국 교회’ 운운하는 이야기를 감히 하기가 어렵다. 다만, 개인적인 신앙 경험 속에 한국 교회라는 맥락이 배어 있을 수는 있으니 소극적 태도로 이야기해 볼 수는 있겠다.

   ‘한국 교회’라는 단어를 ‘보수적 신앙’을 표현하려는 의미로 쓴다면, 그런 신앙의 분위기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있는 것 같다. 스미스에게도 그런 문제의식이 있었으며, 『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는 그런 ‘막연한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쓴 책이다. 그리고 이것이 타격하는 대상은 단순히 기독교가 아니라 모종의 확실성을 추구하려는 ‘근대적 기독교’다.

   ‘성경은 해석이 필요한 글’이라는 말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하냐고 물어보면 그 역시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려워한다. 당연하다. 웬만큼 오만하지 않고서는 자신이 성경을 읽는 족족 그대로 직관적으로 이해한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정직하게 사물을 대하는 사람은 무언가를 이해할 때 자신의 편견이나 선입견이 관여하고 있음을 인정할 것이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 역사를 가로지르는 구약의 여러 본문, 바울이 여러 교회에 보낸 편지 등을 읽을 때 어떤 부분은 상황을 고려해야 이해해야 한다고 하면서, 또 어떤 부분은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게 아니다. 우리가 대하는 모든 것은 해석이 필요하다. 스미스는 인간을 해석하는 존재로 본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인데, 성경 앞에만 서면 다들 왜 작아지는가. 이 책이 번역된 시기와 지금 시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을 다루는 것이 각각 어떤 의미인지를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선입견에 입각한 지식을 진리로 치환해 주장하려는 시도가 과도하게 일어나는 모든 곳에서 이 책이 지닌 문제의식은 늘 유효하리라 생각한다. 2000년대 중반에 북미에서 스미스가 가진 문제의식이 2010년대 중반에 대한민국에 사는 내가 가진 문제의식과 어느 정도 공명한 것처럼 말이다.

   물론 스미스의 논의는 단순히 포스트모더니즘을 긍정하고 근대적 기독교의 해독제로 잘 활용하자는 주장에서 그치지 않는다. 결국 그가 말하려는 공교회적 신앙은 창조 세계(물질), 시간, 역사를 긍정하는 성육신적·성례전적 기독교다. 현실 속에서 초월을 보는 특별한 감각을 기르는 기독교다. 이걸 지금 다 이야기하긴 어렵고, 스미스의 이 책과 더불어 그의 이후 저작인 문화적 예전 시리즈 3부작을 보면 좋겠다.

 

◇ 에라스무스 연구소에서 독서 모임을 인도하고 있는 설요한 간사 © 에라스무스연구소
◇ 에라스무스 연구소에서 독서 모임을 인도하고 있는 설요한 간사 © 에라스무스연구소

 

   앞으로의 출판 계획이 궁금하다.

   내가 지금 있는 곳에서 출판을 주도하지는 않지만, 이런 책을 내면 좋겠다 하고 관심을 두는 바는 명확하다. 바로 내가 딛고 있는 곳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기독교다. 즉, 구체적인 현안을 직접적으로나 은유적으로 담은 콘텐츠를 지향한다. 이번 스미스 책은 그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든, 결국 현실적인 책이다. 굳이 분류하자면 실천신학서에 가깝다. 스미스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의 구체적인 예배 현장이 얼마나 현실을 담아내며 또 현실을 지향해야 하는지 그 함의가 명확히 드러난다. 그의 논의를 단순히 공교회적 예전 혹은 그 예전의 형식을 강조하는 논의로 보면 곤란하다. 결국 현장(모든 현장은 창조 세계의 부분이다) 안에서 초월을 경험하는 것이 관건이다. 여기에 사랑과 정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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