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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초 시작한 연재 글이 21회 차로 마지막에 이르렀다. 앞서 썼던 글을 회고, 성찰하며 연재한 이유와 목적 그리고 이후 과제 등을 언급할 지면이다. 필자에게 이렇듯 넉넉한 지면을 허락해준 『주간기독교』에 감사하며 마지막 글을 시작한다. 처음 위 주제를 생각한 것은 소위 정설처럼 여겨진 한국 신학의 세 광맥 속에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 생기한 두 사조가 간과되었다는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보수주의, 진보주의, 자유주의가 통상 말해졌으나 이들은 후대의 범주일 뿐, 초기 기독교를 통섭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하여 필자는 기독교 사회주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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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 현장顯藏아카데미 원장·전 감신대 교수
2022.11.30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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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서 보듯 이신이 귀일코자 했던 환원 처는 성서 그 자체가 아니라 원시 기독교의 토대가 된 묵시의식, 곧 전위적 환상이었다. 그것은 가치 전복적인 저항성을 담지했던 것으로 영적 양극성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신은 묵시의식을 유대-기독교적 사유지평에 한정시키지 않았고 각기 다른 시공간에서 현상학적 재현가능한 것으로 이해했다. 필자가 전위성, 민주성과 함께 토착성을 묵시 의식의 세 차원으로 꼽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슐리얼리즘 사유를 매개했으나 유대적 사유지평에 머문 발터 벤야민과 다른 점이다. 유대 정치사상가로 위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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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 현장顯藏아카데미 원장·전 감신대 교수
2022.11.16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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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에서는 신학자 이신의 그림 몇 점을 소개한다. 주지하듯 이신은 기독교 환원운동의 본원으로서의 전위 묵시의식을 초현실주의 미술 사조와 연관하여 설명했고, 그림에 신학적 의미를 담았기 때문이다. 이 역시 기독교의 고유한 묵시의식을 현상학적으로 재현시키려는 의지의 표현에서 비롯했다. 거듭 말하지만, 환원신학자 이신은 문자로 확정된 성서가 아니라 기독교의 정체성을 확정한 묵시의식의 재현, 곧 성령활동에 관심을 가졌다. 그렇기에 이신의 강의를 들었던 70년대 초중반 (유학 이후) 시절의 학생들은 환원이란 말보다 자유, 창조 등의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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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 현장顯藏아카데미 원장·전 감신대 교수
2022.10.18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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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단을 떠나 자생적인 그리스도 환원운동에 15년간 몸담았던 이신은 1966년 미국 유학을 떠났다. 기독교의 근본을 철저하게 추구할 목적에서였다. 국내에서 경험한 선교사들과의 갈등도 신학적으로 해결하고 싶었다. 6년 가까운 세월 동안 듀크, 네브라스카 대학을 거쳐 환원운동의 산실인 벤터빌트 대학에서 묵시문학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곳은 동석기 목사 등 환원운동 선배들이 공부하던 곳이었다. 유학 생활 중 그는 평소 원했던 그림을 그렸고 10여 차례 전시회도 열었다. 그의 창조적 상상력이 맘껏 발현되던 시기였다. 10여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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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 현장顯藏아카데미 원장·전 감신대 교수
2022.10.04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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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16회에 걸쳐 토착화 신학 사조, 기독교 사회주의 그리고 그리스도 환원운동의 흐름과 특색을 살펴보았다. 주지하듯 토착화 신학은 상대적으로 한국 신학의 한 트렌드로 자리 잡았으나 기독교 사회주의와 자생적 환원운동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폄하되거나 왜곡된 채 묻혀있었다. 가장 큰 이유로는 해방 전후 공간에서 우익 민족주의가 대세를 이뤘던 까닭이다. 제국 치하에서 민족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기독교가 각축을 벌이며 해방독립을 추구했지만, 기독교는 결국 사회주의 대신 민족주의와 손잡고 말았다. 우익 성향의 민족주의는 사회주의와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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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 현장顯藏아카데미 원장·전 감신대 교수
2022.09.15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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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장에서 그리스도 환원운동에 몸담았던 중요 인물들 몇 사람을 언급했다. 이들은- 김은석, 동석기, 성낙소, 강명석- 모두 이 운동의 끝자락에 위치한 신학자 이신이 선택한 사람들이다. 주지하듯 이신은 이들 모두를 자생적 환원운동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필자는 이들 중 특별히 김은석에게 방점을 찍었다. 이신의 관점을 따른 결과였다. 나머지 인물들의 경우 일본 등지에서 미 선교사들과 짙은 교감을 나눴던 반면 김은석은 길림을 경유하여 충청, 호남 지역에서 자생적 성령운동을 펼쳤던 까닭이다. 그럼에도 이들을 자생적 환원운동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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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 현장顯藏아카데미 원장·전 감신대 교수
2022.08.30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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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서 우리는 김은석 목사를 중점적으로 다뤘다. 시대적으로 다소 후기 인물임에도 그의 자생성이 환원운동의 미래를 위해 중요하다고 여긴 결과다. 여기서는 초기 환원운동의 정착을 위해 애쓴 그의 동료들 몇 사람을 더 소개할 생각이다. 그 끝자락에 자리했던 이신은 김은석 외에 동석기 목사(1881-1972), 성낙소 목사(1890-1964)를 중요 인물로 꼽았고 이 운동의 선구자로 여겼다. 하지만 이에 더해 강명석 목사(1897-1941)와 최상현 목사(1891-1950) 등을 더 언급해야 한국 기독교 역사 속 사조로서 충분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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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 현장顯藏아카데미 원장·전 감신대 교수
2022.08.16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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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주제가 기독교 사회주의에서 그리스도 환원운동으로 바뀔 무렵, 지난 5월 말에 전남 영암 소재 상월 그리스도교회를 찾게 되었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그곳서 순교한 이들을 추모하는 예배에 참여키 위함이었다. 예배당을 순교사적지로 지정하는 축하 예배였다. 주지하듯 한국전쟁 당시 영암지역도 좌우대립이 극심했던 곳 중의 하나였다. 우선 국민보도연맹, 즉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전향시킬 목적으로 이승만이 급조했던 이 단체에 속했다는 이유로- 북쪽에 협력할 것이란 추정 탓에– 전쟁 전후로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동시에 195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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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 현장顯藏아카데미 원장·전 감신대 교수
2022.07.26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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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 세력 판도에서 그리스도 교단은 소수파에 속한다. 예배 시 악기를 사용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혹은 성령의 현재적 활동 인정여부에 의해 심지어 지역 차에 근거, 교단이 양분 상태에 처했으니 그 존재감이 크지 않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대원칙, ‘그리스도에게 돌아가자’는 소위 환원운동을 선취했고 교파를 넘어선 ‘그리스도의 교회’란 이름을 지녔음에도 역설적으로 이 운동은 결국 특정 교단으로 귀결되었다. 한국 전쟁 전후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서 성령운동을 통해 확산되었던 자생적 그리스도 환원운동의 축소, 몰락(?)은 한국 기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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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 현장顯藏아카데미 원장·전 감신대 교수
2022.07.11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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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언급했듯이 한국 기독교 역사 속에서 지금껏 소홀하게 취급되었으나 본 환원운동이 지닌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당시 성서 시대의 예수 공동체와 오늘이 교회는 거의 닮은 구석이 없다. 예수 사후 2천 년이 지난 오늘, 작금의 기독교가 예수정신과 한없이 멀어진 탓이다. 그동안 서구 역사에서 이/저런 종교 개혁운동이 일어난 것도 사실 그리스도 환원운동의 일환이었다. M.루터의 종교 개혁을 비롯하여 J. 칼빈의 장로교, J. 웨슬리의 감리교, 그 외의 크고 작은 수많은 개혁운동이 모두 기독교의 원형을 찾고자 했던 흔적들이다. 일백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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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 현장顯藏아카데미 원장·전 감신대 교수
2022.06.21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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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사회주의는 두 가지 점에서 사회주의와 달랐다. 공산체제의 옷을 입었어도 기독교 정신을 그 속에 담았고 계급의식을 중시했으나 민족가치를 상부구조가 만든 허구라 여길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본 호에서 언급할 기독교 사회주의자들- 여운형, 강성갑, 박순경- 은 기독교적 시각에서 좌우이념의 공존을 시도했거나 기독교와 주체사상간의 대화를 노력했으며 빈곤층을 단지 계급의식으로 환원시키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들에게 사회주의자란 꼬리표가 가당치 않다는 비판이 종종 있어왔다. 한마디로 기독교사회주의라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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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 현장顯藏아카데미 원장·전 감신대 교수
2022.06.08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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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듯 이동휘는 강화 출신으로서 고종황제의 총애를 받던 군인이었다. 강화 수호조약 이후 서구 기독교를 받아들여 감리교도가 된 그는 평신도(권사) 신분으로 교회와 학교를 여럿 세웠다. 오늘 강화도 내에 감리교회가 일백여 개가 생긴 것은 오롯한 그의 공이다. 이렇듯 그는 기독교를 배경 삼아 강화도에서 항일 운동을 주도했고 북간도 기독교를 일으켰으며 전덕기, 안창호, 이승훈 등과 함께 신민회 창건(1908)을 주도했다. 일본이 조작한 총독 암살 시도의 책임으로 야기된 105인사건(1911-1913) 이후 급속하게 세를 잃었으나 신민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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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 현장顯藏아카데미 원장·전 감신대 교수
2022.05.25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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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했듯이 3·1 혁명의 실패 이후 한국적 상황은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 민족주의자들 경우 지금껏 독립 투쟁-저항적 민족주의-대신 일제의 문화 순응 정책에 따라 회고적 역사주의자들로 변신했다. 예외도 있었지만 과거 역사에 무게를 싣고, 현실을 견디는 (수동적)방편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물론 이들 민족주의자들은 조직과 기구를 통해 독립운동을 지속했으나 노선 차 및 기득권 싸움으로 제 역할에 소홀했다. 기독교 역시도 1919년 이전에 보였던 민족 독립을 위한 패기와 기상을 잃었다. 천국지향적인 내세 신앙이 패배 이후 기독교적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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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 현장顯藏아카데미 원장·전 감신대 교수
2022.05.09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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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자들은 봉건질서, 관습 타파에 관심했고 민중들의 복지에 눈을 돌렸다. 민족이란 거대담론보다 그 하층을 구성하는 빈자들, 곧 노동자, 농민의 삶을 개선코자 한 것이다. 언젠가 독립할 조선이 평등하게 재구성, 재탄생 될 것을 기대했다. 계급, 반상 구별을 철폐코자 선언했던 3·1정신의 실현을 위한 것이다. 비록 남북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했지만 자본주의적 서구와 다른 근대를 꿈꿨던 이들 사회주의자들의 이상은 오늘 우리에게도 결코 무가치하지 않다. 자본주의를 비판해 온 프랑스 경제학자 피케티가 개발한 지수 ‘베타 값’이란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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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 현장顯藏아카데미 원장·전 감신대 교수
2022.04.22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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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 사회주의, 기독교가 공존했던 현실에서 기독교 사회주의는 민족주의 기반에서 생기한 토착화 신학만큼이나 중요하게 평가되어야 옳다. 필자는 이 글을 20대 대선이 종료된 시점에서 쓰고 있다. 주지하듯 윤석열은 보수 기독교인들 지지를 받아 힘겹게 당선되었다. 개신교의 폐해를 자양분 삼아 성장한 신천지 집단과 무속을 주술로 변질시킨 사이비 종교인들이 개신교 성직자들과 합세하여 일조한 결과였다. 상대편 후보 이재명이 기본소득을 말하며 체제변화를 시도하자 그것을 공산체제, 사회주의 국가로의 퇴행이라 보고 공격했다. 그렇게 적대시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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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 현장顯藏아카데미 원장·전 감신대 교수
2022.04.08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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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필자 역시도 토착화 신학을 한국 교회사 틀 안에서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이 땅의 신학사가 한국(민족)사의 영향을 떠날 수 없는 것이기에 양자의 관계를 먼저 배워야 했음에도 신학교는 한국역사를 옳게 가르치지 않았다. 이스라엘 역사를 더 중시했고 서구 역사 및 사상사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런 와중에서 우리들 사고체계가 온전히 서구화되고 말았다. 일본 제국주의에는 저항했지만 저항 이후 빈자리를 서구적 가치로 메웠던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토착화 신학 사조는 민족의 얼과 혼을 지키고자 했던 독특한 흐름이었다. 서구는 상대화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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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 현장顯藏아카데미 원장·전 감신대 교수
2022.03.25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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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 틀거지 하에서 기독교를 수용했던 선배들을 좇아 유동식(1922~)은 토착화론을 힘껏 전개시켰다. 토착화론의 성서적 토대를 밝힌 그만한 학자도 아직까지 찾을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당대 독재가 난무하는 정치현실, 값싼 노동력으로 내몰린 인간의 비극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나라를 빼앗겨본 자신들 세대의 시각에서 볼 때 ‘내부적인 정치, 경제 갈등은 상대적으로 소소한 문제로 보였다’고 했다. 앞서 보았듯이 이런 경향성은 해방 전후로 우익 민족주의자들에게 나타난 공통된 감각이라 하겠다. 하여 그는 무속연구를 통해 성서의 본뜻을 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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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 현장顯藏아카데미 원장·전 감신대 교수
2022.03.11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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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사 최병헌의 주저 『만종일련萬宗一臠』은 앞서 말한 신학 논문 「죄도리」와 문학성이 높은 책 『성산명경聖山明鏡』의 결정판이자 이후 토착화 신학의 향방을 결정짓는 대단히 중요한 책이다. 서세동점의 시기 대다수 식자들이 자신의 과거(전통)를 부정하고 서구 것을 추동했지만 최병헌은 과거를 내치지 않았고 비록 변증적이긴 했으나 기독교와 연속성을 갖고 유교를 이해했던 것이다. 『성산명경』이 기독교에 앞선 이 땅의 종교들, 유불선 사상과의 대화였다면 『만종일련』은 지평을 넓혀 세계 종교들을 언급했다. 이슬람교는 물론 조로아스터교까지 등장할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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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 현장顯藏아카데미 원장·전 감신대 교수
2022.02.25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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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듯 서세동점의 시기를 거쳐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과정에서 민족주의의 등장은 단연코 두드러졌다. 유교, 불교를 개혁하려는 유신운동이 일어났고 대종교, 동학 등을 비롯한 자생적 종교들이 민족을 등에 없고 태동된 것이다. 돌덩이처럼 변치 않고 존재하는 민족은 없지만, 외부로부터 영향 받고 자체 변형되면서도 이곳 저곳에서 독자 발전하는 과정 속에서 과거와 오늘을 잇는 원초적 특성, 민족의 오늘을 풀어내는 맹아가 담겼음을 인정해야 옳다. 오늘 우리가 ‘한류’의 이름으로 세계문화를 이끄는 것이 오래된 미래와도 같은 유무형의 문화적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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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 현장顯藏아카데미 원장·전 감신대 교수
2022.02.14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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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도 말했듯이 백년 역사를 넘긴 이 땅의 기독교 성격을 알고 신학이란 학문의 광맥을 찾고자 하면 동시대를 호흡했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와의 관계를 탐색하는 것이 옳다. 이들과의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 기독교 양태가 다양하게 발전, 정착되었고 뭇 신학 광맥을 형성시켰던 것이다. 서구에서 유입된 교파적 기독교를 넘어서고자 하는 기독교 내부의 몸부림도 이런 선상에서 비롯했다. 주지하듯 서세동점 현실에서 이 땅의 사람들은 3,4가지 방식으로 서구와 조우했다. 서구의 종교, 문화 일체를 배척하는 ‘위정척사’파들의 시각이 있었던가 하면 서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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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 현장顯藏아카데미 원장·전 감신대 교수
2022.01.24 1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