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가 반드시 사과에서 시작되는 건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 제75회 프랑스 칸 영화제 때 이른바 ‘아이유 어깨빵’ 사건이 일어났었다. 프랑스 뷰티 인플루언서 ‘마리아 트래블(Maria Travel)’이라는 여성이 레드카펫 행사 때 아이유의 어깨를 밀치고 지나가는 장면이 발단이 되었다. 이 사건은 인종차별 논란으로까지 번질 조짐을 보였는데, 트래블은 인스타그램에 꽤 신속히 사과 메시지를 올렸다. 그리고 명색이 뷰티 인플루언서답게 아이유에게 “사과의 의미로 메이크업을 해드리겠다”라고 제안했다.

   곧바로 아이유 팬들에게서 부정적 반응이 튀어나왔다. 사과의 진의가 의심스럽다, 사과하면서 메이크업 제안을 하다니 황당하다, 아이유를 본인 홍보에 사용하려는 거냐 등 대부분이 거부반응이었다. 트래블은 공적으로 사과했건만, 그녀가 공적으로 용서받은 것 같지는 않다(아이유가 DM을 통해 용서했을 수는 있다). 요컨대 트래블의 공적 사과는 안타깝게도 공적 용서를 불러오지 못했다.

   잘못한 사람 혹은 실수한 사람을 향해, 그 사건을 공론화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경우, 우리는 대체로 공적 사과를 요구한다. 공적 사과는 문제적 사건, 범죄적 행위의 진상규명에서 중요한 초기 단계를 점한다. 그렇지만 가해(를 의심받는)자의 사과가 자동으로 용서를 불러오는 건 아니다. 가해자의 잘못을 확정하고 훨씬 더 정밀하게 질책하기 위해 공개 사과를 요구하는 사례도 있다.

   물론 공개 사과가 공개 용서를 성공적으로 불러온 행복한 사례가 없지 않다. 몇 주 전 아시안컵 축구 대회에서 이른바 ‘탁구 게이트’로 부를 만한 사건이 불거졌다. 그 사건은 대표팀 감독 클린스만의 무심한 무능력 문제보다 더 큰 주목을 받았다. 사건에 연루된 선수 중 한 사람(이강인)이 출연한 상업광고물에까지 그 영향이 빠르게 번졌다. 가뜩이나 경기 결과에 실망해있던 축구팬들은 “실력보다 인성”이라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이강인 선수를 제지하려다 손가락 부상을 입은 손흥민 선수에게 공감할수록 이강인 선수에 대한 공개적 성토의 기세는 거셌다.

   그로부터 얼마 뒤, 프랑스 소속팀으로 복귀한 이강인 선수가 영국 런던에 거주하는 손흥민 선수를 찾아가 사과했고, 손 선수가 이 선수를 용서한다는 기사가 공개됐다. 손 선수에게 용서받은 이 선수는 또다시 용기를 내어 익명의 많은 축구팬들에게도 공적으로 사과의 메시지를 띄웠다. 그랬더니, 긍정 반응(이제라도 사과했으니 잘했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라 등)이 ‘인간성은 그리 쉽게 변하는 거 아니다’와 같은 부정 반응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용서에서 사과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단언해선 안 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용서의 필수 조건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용서 이전에 사과가 선행되면 아주 좋지만, 사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해서 용서가 전연 일어나지 않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사과가 나타났다 해서 당연하다는 듯 용서가 뒤따라 나오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사과하면서 상대방에게 용서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라고 말씀하셨다(마 18:21~22). 베드로가 특별히 용서에 능숙한 사람이어서일까? 베드로에게서 남다른 관대함, 용서의 잠재력을 보셨기 때문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예수는 베드로를 비롯해 수많은 보통 사람들 모두가 용서를 빈번히 실천할 수 있다고 믿으신 거다. 덧붙이자면 “난 절대 용서 못해” 하는 식으로 자신에게 용서의 능력이 없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에게 용서는 특수한 활동이 아니라 보편적 활동임을 환기하신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도 인간 사회에서는 용서가 ‘행위’를 항상 따라다니며,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용서를 신앙 현상이자 동시에 정치 현상으로 명확하게 이해하고 선명하게 적용한 분으로 나사렛 예수를 추앙한다.

   아렌트의 정치이론에서 기초 중의 기초가 되는 하나의 공식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정치=행위’이다. 행위는 나타난 즉시 사라진다는 특징이 있다. 녹음하거나 녹화해 두면 나중에 ‘재생(replay)’해서 그 행위를 관찰할 수는 있지만, 행위의 생생함은 이미 거기에 없다. 예를 들어보자. 타인과 만나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대화를 마치고 돌아오며 머릿속에서 “아! 그때 왜 그 말을 하지 못했을까?” 혹은 “어이쿠! 내가 그때 왜 말을 꼭 그렇게 했던가?” 하면서 아쉬워하거나 후회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던가? 아렌트에 따르면, 그럴 때 매번 자신의 순발력 부족을 탓하며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는 건 딱히 권장할 만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 건네면 어떨까 싶다. “행위(말을 포함함)라는 건 말이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앞으로 전진하기만 할 뿐 뒤로 돌아가지는 않아. 툭툭 털어버리자. 다음을 기약하자.” 그러니까 환원 불가능성(irreversibility)을 의식적으로 환기하자는 것.

   추가로, 환원 불가능성의 뼈아픈 역사적 사례 중 하나를 들어보겠다. 1938년 영국, 프랑스, 헝가리 등의 대표들이 독일 뮌헨에 모여, 체코의 주데텐란트를 병합하겠다는 히틀러의 제안에 동의해주었다(이른바, 뮌헨협정). 그러나 독일의 체코 주데텐란트 병합은 1939년 폴란드 침공으로 개전된 제2차 세계대전의 진정한 서막이었다. 만약 1938년 뮌헨에서 영국, 프랑스, 헝가리 등이 히틀러를 믿어주지 않았었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역사에 만약(if)은 없다”라는 말은 행위의 환원 불가능성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문장이다. 환원 불가능성을 표방하는 행위는 우리 주변에서 날마다 일어난다. 행위는 되돌려지지 않을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새로운 행위가 발생한다. 좋은 행위든 나쁜 행위든 바람직한 행위든, 인류의 행위는 지구상 곳곳에서 계속되는 중이다. 우리 은하에서 지구별이 사라진다면 모를까, 지구별이라는 이 활동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인류의 행위는 그치지 않을 것이다.

 

   끝없이 과정이 이어질 뿐 종말은 ‘아직’ 오지 않았다

   최근 일이백 년 사이 지구별에 치명적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 게다가 이 이상 징후는 시시각각 심각해진다. 1972년 로마클럽에 참여했던 지성인들이 ≪성장의 한계≫를 발표할 때까지만 해도 긴가민가 하는 의견이 없지 않았지만, 지금은 기후변화, 쓰레기, 각종 오염, 생태계 훼손 등에서 위기 징후를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많이 묵직해졌다.

 

◇ ≪성장의 한계≫ 보고서
◇ ≪성장의 한계≫ 보고서

 

   그런데 일부 기독교인들은 지구별에 나타난 위기의 징후에 동의하면서, 그렇기에 다만 세상의 끝을 기다릴 뿐 별다르게 개시할 행위(action)란 건 인류에게 허락되어 있지 않다며, 체념하는 모습을 보인다. 때로 그 체념 분위기를 종말론적 신앙으로 홍보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초대교회 때부터 신앙의 선배님들이 이미 종말 세상을 살았으며, 그 종말론적 삶이 2천 년 이상 존속돼 왔다는 역사적 사실 말이다. 초대교회 당시, 종말 즉 ‘세상의 끝’은 ‘절멸’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심지어, 무려, 희망을 가리켰다. 기독교의 신앙 이론 중 어찌 보면 ‘밝디밝은’ 면이었다. 신앙의 선배님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다 같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철석같이 믿었다(딤전 2:4). 그래서 오늘날 전 세계 방방곡곡에 기독교인들이 ‘누룩처럼(눅 13:20~21)’ 퍼져있게 되었다!

   이 지구에 나타난 치명적 위기를 대할 때, 종말론적 신앙으로 파국을 목숨 걸고 경계하며 당대에 희망을 쏘아 올린 신앙의 선배님들을 따라서, 우리는 이제껏 지구환경과 지구 자원에 저지른 잘못된 우리 행위들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사과하면 좋겠다. 우리의 공개 사과가 혹 하나님의 공개 용서를 자동으로 일으키진 않을지라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단3:18), 그 용서 사건이 우리에게 일어나기를 역설적으로 희망하면서 말이다(니느웨를 용서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용서를 벌써 예비해 두셨을지도 모른다).

   인간을 이토록 멋진 지구별에 이토록 멋진 생명체로 지어주신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행위 능력이 몇 년 몇 월 며칠에 ‘단칼에’ 종료되길 원하실지, 아니면 이 행위 능력이 오래도록 번성하며 꽃피우길 원하실지(창1:28), 구약과 신약의 여러 다양한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차분히 헤아려보면 참 좋을 것 같다. 겸하여, 아렌트의 다음과 같은 다정한 말도 같이….

 

“용서가 없다면, 우리 행위의 결과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면, 우리의 행위 능력은 단 한 번으로 끝났었을 것이다. 결코 회복할 수 없는 단 한 번의 행위.” (The Human Condition, 237).


이인미는 한나 아렌트를 연구하는 신학박사다. 아렌트의 정치이론은 인간사랑, 세계사랑의 이론인 까닭에 다정하다. 이 다정한 정치이론을 되도록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어, 아렌트를 주제로 하는 책 두 권을 썼다. 『해나 아렌트의 행위이론과 시민 정치』(2020,커뮤니케이션북스),『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정치 수업』(2023,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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