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의 영의 신학,
슐리얼리즘 신학의 관점에서

 

올 초 시작한 연재 글이 21회 차로 마지막에 이르렀다. 앞서 썼던 글을 회고, 성찰하며 연재한 이유와 목적 그리고 이후 과제 등을 언급할 지면이다. 필자에게 이렇듯 넉넉한 지면을 허락해준 『주간기독교』에 감사하며 마지막 글을 시작한다. 

   처음 위 주제를 생각한 것은 소위 정설처럼 여겨진 한국 신학의 세 광맥 속에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 생기한 두 사조가 간과되었다는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보수주의, 진보주의, 자유주의가 통상 말해졌으나 이들은 후대의 범주일 뿐, 초기 기독교를 통섭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하여 필자는 기독교 사회주의와 자생적 환원운동을 상술한 세 사유 틀에 앞선 신학운동이라 여겼다. 그럴수록 기독교 유입 당시 시작된 토착화 신학 사조와 더불어 이 셋의 중요성을 힘껏 역설했다. 거듭 말하지만 세 사조는 서구적 범주로 환원될 수 없는 독자성을 지녔던 까닭이다. 이후 이들이 자유, 진보, 보수의 틀로 확장, 전개되었고 그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처음과 달리 왜곡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를 처음부터 서구 신학적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옳다고 볼 수 없다. 

주지하듯 서세동점 시기, 더구나 일제의 침탈이 가속화된 시점에서 이 땅에 유입된 초기 기독교는 우리 토양에서 토착화, 기독교 사회주의 그리고 자생적 환원운동으로 각기 달리 반응했다. 필자는 이들 세 사조의 발원지가 감리교였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여타 교파와 달리 초기 감리교인들의 독특한 역사인식 때문이겠고, 경험을 중시한 감리교의 자유로운 성서해석 탓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목하 감리교단은 그 설립을 위해 큰 공헌했던 NCCK 탈퇴를 주장하며 자신들 역사를 부정하고 일체 계급, 성별, 빈부, 반상, 종교 차를 극복했던 지난 역사를 지우려 하며 자신들 근원 성을 잊고 교파적 게토로서 안주하고 있는바, 회억하며 글 쓰는 나 자신을 한없이 부끄럽게 한다. 그럴수록 환원의 귀처, ‘처음’을 알리는 일을 사명삼아 연재를 시작했다. 물론 감리교를 위한 것만은 결코 아닐 것이다. 초기 기독교의 풍성함을 오늘의 기독교 현실에 알릴 목적이 우선했다. 거듭 말했듯이 필자에겐 교파로서 감리교회는 더 이상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당시는 기존의 유불선 종교들의 역할이 쇠한 시점이었고 신종교로서 동학의 개벽사상이 전개되던 때였다. 기독교를 비롯한 이 땅의 종교들은 민족주의 내지 사회주의 사조와 결합 내지 배타하며 정체성을 확보했고, 저마다 경쟁적(?)으로 독립을 위해 투쟁하며 새 세상을 꿈꿨다. 불교, 유교 유신론도 있었지만 기독교와 동학의 역할이 가장 컸다. 이 두 종교는 민족주의, 사회주의와 결탁하며 자신들 시대적 역할을 감당했었다. 이 과정에서 토착화 사조는 민족주의와 짝을 이뤘고 기독교 사회주의는 사회주의를 자신 속에 반영, 기독교적으로 녹여낸 것이다. 이 경우 민족주의에겐, ‘우익’의 이름이 붙고 사회주의에게는 ‘좌익’의 명패가 달렸다. 광복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 우익 민족주의가 건국이념이 되었고 기독교 사회주의를 비롯한 좌익 사상은 온통 배제되었다. 실제로 사회주의 계통에서 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되었음에도 말이다.(『독립운동 열전 1.2– 잊힌 사건을 찾아서』, 임경석, 푸른역사 2022). 초기 토착화 사조는 좌익을 배제한 우익 민족주의의 산물이었다. 이들 사조가 유불선 전통과 연속선상에서 기독교 복음을 이해코자 한 것은 탁견이었지만 동학을 배제(?)한 것은 과오라 할 것이다. 1920년대 전후로 기독교는 동학의 도움을 크게 받았으면서도 경쟁관계에 있었고 사회주의와의 합류를 시도한 집단도 있었기에 거리를 두었다고 생각한다. (『개벽의 사상사』, 강경석 외, 창비 2022). 물론 기독교 사회주의 흐름도 필자는 예사롭지 않게 살폈다. 이들 사조가 토착화 사조의 흐름 속에서 나왔다는 사실도 미비한 대로 밝혔다. 처음 기독교인들이 사회(공산)주의자로 전환한 경우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이제는 이들을 정죄, 부정할 것이 아니라 그들 전환 및 변신의 이유를 깊이 성찰할 때이다. 자본주의 폐해로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위협에 빠진 탓이다. 공유경제가 요청되는 시점에서 기독교 사회주의는 오히려 이 시대의 ‘New Normal’ 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이 공산주의 체제까지 옹호할 수 있는 것인지는 비판할 여지가 있다. 이들 중 다수는 신앙과 이념을 동일시 했으니 말이다. 

   필자는 마지막으로 ‘자생적 그리스도 환원주의’를 같은 비중으로 다뤘다. 앞선 두 사조와 연결점으로 이들 다수가 감리교도였고 길림 지역에서의 새로운 이상촌 경험을 염두에 두었다. 일본 등지에서 마르크스사상에 심취한 경력의 소유자들도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기독교 사회주의가 물적 토대에 관심했다면 이들 자생적 환원운동가들은 영적 각성에 초점을 두었다 할 것이다. 독립운동에 대한 시각차도 여기서 비롯했다. 하여 전자가 김교신의 ‘조선적’ 기독교와 견줄 수 있다면 후자는 이용도의 ‘영적’ 기독교와 상응할 수 있겠다는 논지도 조심스럽게 펼쳤다. 어쩔 수 없이 경제적 종속 상태에 있을지라도 사상적, 신앙적으로는 더욱 주체적이길 바랐던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서구서 유입된 교파적 기독교에 만족하지 않고 그리스도에게로, 성서의 본래성으로 환원을 역설했다. 이는 토착화 사조가 민족적 주체성을 강조한 것과 본뜻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이 전라도 지역에서 김교신, 특별히 최태용 계열의 무교회주의 그룹과 만난 것은 이 점에서 아주 자연스럽다. 자생적 환원운동이 주로 충청, 전라도 지역에 한정적으로 발현된 것이 못내 아쉬운 부분이다. 성서로의 환원을 성서문자주의로 귀결시킨 것도 한계로 작용했다. 초기의 영적 기독교의 본질을 잊은 결과였다.

   이들 세 사조의 한계를 극복하고 내포된 긍정적 기각들을 통섭할 인물이 바로 슐리얼리스트 신학자 이신이었다 주지하듯 그 역시 해방 전 감리교 신학대학교에 입학, 1950년 2월 졸업하여 감리교 전도사로 공적 삶을 시작했다. 토착화 사조는 물론 종교사회주의 흐름도 이/저런 방식으로 접했을 것이다. 유학 후 그가 해천 윤성범과 더불어 종교사학회 활동을 한 것과 가난과 맞닥트렸던 실존적 현실이 이를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하지만 감리교단을 떠나 그리스도 환원운동에 몸담은 이후 그는 성서, 곧 기독교 신앙의 그루터기에 관심을 두었다. 그것이 바로 초대 교회의 모체로 알려진 신구약 중간기에 형성된 묵시문학이었다. 여타 환원주의자들과 다르게 성서 문자(주의)대신 묵시의식에 집중했던 것이다. 그는 묵시의식을 ‘영적 양극성’, 곧 현실-오늘의 경우 자본주의-부정의 방식으로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려는 현상학적 차원에서 이해했다. 이런 인간 의식을 슐리얼리즘 사조의 도움으로 정교하게 서술했고 영의 활동성으로 신학화 시켰다. 이 과정에서 이신은 앞선 세 사조를 창조(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다. 우익 민족주의 틀 속에 갇혀 이론화된 토착화 사조를 현실과 대면시켰고 이념화된 사회주의를 상상력의 창조성을 통해 부드럽게 했으며 자신의 실존을 위태롭게 할 만큼 성서 문자주의와 지속적으로 갈등했다. 본 연재를 통해 누차 언급했듯이 이신은 수운 최제우의 종교체험, 곧 개벽의 종교성을 전위 묵시의식의 차원에서 이해했고 공산주의체제 속에 살았던 러시아 사상가 베르자이에프의 생각을 빌어 마르크스 이념을 비판했다. 교파적 기독교, 서구 신학을 비롯한 일체 서구이념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한 것이다. 그가 수용했던 슐리얼리즘 사조 또한 자유로운 영의 활동을 이해하는 틀로서 기능했을 뿐이다. 이렇듯 이신은 서구에 대한 사상적, 정신적 종속을 원치 않았다. 그럼에도 이신은 부패했던 현실교회를 붙들고 끝까지 진리실험을 한 목회자였다. 묵시의식의 실현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그루터기로 삼고 단순 믿음을 넘어 그분 마음을 헤아리며 살고자 애썼다. 확언컨대 그만큼 토착(한국)화된 교회, 유기체적 한 몸 이룬 교회를 꿈꾼 신학자도 없었을 것이다. 

   이 세 사조를 하나로 엮는 창조적 과정에서 아쉬운 점도 없지 않았다. 내재적 비판의 시각에서 두 가지 점을 적시하며 본 연재를 마무리하겠다. 주지하듯 이신은 묵시문학과 그들 묵시가들 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예수를 이해했고 재현 가능성을 현상학적으로 밝혔다. 하지만 최근 그리스도 운동의 기원을 달리 보는 시각도 많다.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은 예수를 지혜서와 연루시켜 이해한다. 동시에 묵시문학에 대한 신학적 이해 및 판단 자체도 성서학자 에른스트 케제만에 의존했던 이신과 다른 점이 많다. 지금껏 생존했더라면 이점에 대한 근본적 해명을 요청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필자는 묵시문학이 다른 어떤 사조보다 그리스도교 기원과 가장 근접하다는 이신의 확신에 동조한다. 문제는 묵시의식을 현상학적으로 이해하여 오늘과 관계시키는 방식이다. 이신은 현상학적으로 혹은 영의 시각에서 과거와 오늘 혹은 동서의 의식을 ‘역사적 일관성 없는 유사성’이란 말로 상호 연결 지었다. 영적 양극성을 지닌 전위 묵시의식이 시공간적 차이를 뛰어넘어 재현될 수 있다는 아주 놀라운 발상이다. 기독교의 절대(배타)성을 벗길 수 있는 확실한 답이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논리적으로 정교한 설명이 부족했다. 필자 역시 이에 착안하여 의식의 유사성‘을 ‘역사유비’란 말로 언표했으나 이 또한 아직 충분치 않다. 종래의 존재유비, 신앙유비 이상으로 그 논리를 다듬어 갈 필요가 있겠다. 이를 위해 더 많은 학자의 관심과 연구가 필요하다. 비록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이신은 신학의 미래를 앞서 말한 선각자였기 때문이다. (끝)

※ 그동안 애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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