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공개념에 대한 비난
최근 토지공개념에 쏟아지는 비난을 지켜보며 필자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토지공개념은 사회주의의 토지국유제와는 전혀 다른 제도이다. 토지국유제가 토지의 사용권, 처분권, 수익권을 모두 국가가 장악하고 민간에게는 어떤 권리도 인정하지 않는 제도라고 한다면, 토지공개념은 세 권리를 민간이 누릴 수 있도록 허용하는 대신에 토지의 공공성이 구현될 수 있도록 일정한 제한과 의무를 부과하는 제도이다. 전자에서는 민간의 창의성이 전혀 발휘될 수 없는 반면 후자에서는 그것이 유감없이 발휘된다는 점에서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더욱이 토지공개념 제도에서는 민간의 자유와 창의성을 보장하는 가운데 토지 소유에 따르는 불로소득을 차단하기 때문에, 노력한 만큼 대가를 누리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이상을 완벽하게 실현할 수 있다. 이런 제도를 두고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어처구니가 없다. 

두 번째 이유는 대한민국의 현행 헌법에 토지공개념 조항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현행 헌법 제122조 “국가는 국민 모두의 생산 및 생활의 기반이 되는 국토의 효율적이고 균형 있는 이용·개발과 보전을 위하여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그에 관한 필요한 제한과 의무를 과할 수 있다.”가 바로 그것이다. 헌법재판소도 각종 위헌 심판 판결에서 토지공개념이 우리 헌법의 정신임을 거듭 확인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토지공개념을 위헌이라고 믿고, 토지의 공공성을 구현하려는 정책이 시행될 때마다 위헌 시비가 일어난 것은 토지공개념 규정의 내용이 추상적이어서 해석상 논란의 여지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헌법 정신과 실제 정책 간의 괴리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헌법상 토지공개념 조항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이고 확실하게 수정할 필요가 있다. 토지공개념과 관련하여 개헌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은 바로 그런 차원에서다. 그런데 미래통합당은 이런 취지에서 제기되는 개헌 주장을 ‘헌법 정신의 뼈대를 건드린다’며 반발하니 이를 어째야 하나?

하지만 내게 더 큰 문제로 느껴지는 것은 기독교계 일각에서 퍼붓는 비난이다. 노골적으로 극우 성향을 드러내는 이 사람들은 문재인 정부를 종북좌파로 비난하는 것은 물론이고, 토지공개념을 콕 집어서 공산주의 경제정책이라고 매도한다. 최근에는 비교적 합리적이라 여겨졌던 목회자들까지 이 세력에 동조하는 움직임을 보여서 걱정을 자아내고 있다. 기독교인, 특히 목사는 성서에 하나님의 말씀이 담겼다고 믿는 사람 아닌가? 그런데 성서 가운데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토지공개념 정신을 정면으로 반대하다니,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필자는 오래전부터 성서에 담긴 토지공개념 정신을 연구하고 전파하는 일에 헌신해 왔다. 그런데 요즘 기독교인들이 이를 반대하는 일에 앞장선다고 하니, 지금까지의 내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 같아서 낙심이 된다. 성서에서 왜 “여러분은 이것을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집에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잠자리에 들 때나 아침에 일어날 때나 이것에 대하여 항상 이야기하고, 또 여러분의 집 문기둥과 문에 이 말씀을 기록해두십시오.”(신명기 11:19)라고 명령하는지 이유를 알 것도 같다. 

토지공개념 지지는 기독교인의 의무
성서에서 토지공개념 정신이 분명하게 나오는 곳은 레위기 25장이다. 다른 성경에도 군데군데 관련 구절이 나오지만, 레위기 25장은 그 정신을 집중적으로 서술하고 있어서 특히 중요하다. 혹자는 레위기 어디에 토지공개념이라는 말이 나오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성서에서 토지공개념은 희년(Jubilee)이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사실 오늘날 교회에서 희년이라는 말처럼 오용되고 있는 용어도 없다. 어떤 사람은 자기 교회 설립이 50년 됐다며 그 해를 희년이라 부르고, 어떤 목사는 자기 사역이 50년 됐다는 뜻에서 희년을 갖다 붙인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 나라 신학의 핵심 개념을 어처구니없게 오해한 대표적인 사례다. 

희년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파별로, 가족별로 평등하게 분배받은 땅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번역에 따라 기업, 유업, 산업, 업 등 다양하게 표현된 그 땅은 이스라엘 백성의 생존에 필수 불가결한 터전이었다. 그런 까닭에 처음부터 토지분배의 평등성은 무척 중요한 과제였다. 여호수아는 땅을 분배하기 전에 먼저 각 지파에서 세 사람을 뽑아서 그들에게 가나안 땅 실지 조사를 맡기고는 지도를 그려오게 했다. 그런 다음 그 지도를 바탕으로 지파별·가족별 토지분배를 단행했다. 이때 제비뽑기를 활용했는데, 이는 분배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토지분배는 면적이 아니라 가치를 기준으로 했다고 한다. 19세기 후반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이라는 명저로 전 세계를 뒤흔든 미국의 경제학자 헨리 조지(Henry George, 1839~1897)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평등한 토지권’의 원칙을 지키라고 명령한 것으로 해석했다. 오늘날 토지공개념을 주창하는 이유는 바로 이 평등한 토지권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토지공개념은 희년의 다른 표현이다. 

레위기 25장에는 토지 거래 규정도 들어 있다. 그러나 이때 거래가 허용되는 것은 토지 그 자체가 아니라 다음 희년까지의 토지 사용권이었다. 어떤 사람이 가난이나 불의의 재난으로 자기 땅의 사용권을 팔았다 할지라도 자신이나 가까운 친척(근족)이 언제라도 토지를 무를 수 있도록 했다. 무르지 못하는 경우에도 다음 희년이 되면 그 땅은 팔았던 사람에게 무조건 돌아가도록 하였다. 50년이 지나는 사이에 토지 보유의 불평등이 나타날 수 있었지만, 50년째에는 모든 토지가 원래 주인에게 되돌아가는 전면적인 리셋(reset)이 행해졌던 것이다. 오늘날 거래 계약의 절대적 효력을 신봉하는 우리로서는 토지 사용권을 넘긴 당사자와 심지어 그 근족에게까지 아무런 조건 없이 언제라도 토지 무르기를 인정하는 규정을 선뜻 이해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평등한 토지권의 원칙이 거래 계약의 효력을 능가할 정도로 중요한 이상이었음을 말해준다. 

성서에는 평등한 토지권을 유지하기 위한 또 다른 장치가 들어 있다. 바로 각 가족에게 분배된 토지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놓였던 지계표다. 신명기 27장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넌 후 그리심산과 에발산에서 행할 축복과 저주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행위는 저주받아야 할 12가지 죄악 가운데 하나로 명시되어 있다. 이웃의 지계석을 옮기지 말라는 권고는 신명기 19장 14절, 잠언 22장 28절, 23장 10절에도 나온다. “유다 방백들은 지계표를 옮기는 자 같으니”(호세아 5:10)라는 구절은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행위가 이스라엘 사회에서 엄청난 죄악으로 간주되었음을 말해준다. 

구약성서를 주의 깊게 공부하면, 평등한 토지권을 위해 제비뽑기, 지계표, 토지 무르기, 희년의 토지 반환 등 실로 여러 겹의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입만 열면 하나님 말씀을 운운하며 일점일획까지 어김없이 지키고 있는 듯 행세하는 사람들이 성서에서 이처럼 강조하고 있는 중대한 율법을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라 매도하며 정면으로 맞서고 있으니 참 난감한 일 아닌가? 필자는 그들이 공부가 부족한 까닭에 몰라서 그렇게 행동한다고 이해해주고 싶다. 
 
대한민국은 해방 후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평등한 토지권의 이상을 실현한 적이 있다. 1950년 일제 강점기에 성립한 식민지지주제를 해체하고 경작 농민에게 토지를 평등하게 분배하는 농지개혁을 단행한 것이다. 오늘날 극우 기독교 인사들이 극구 상찬하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농지개혁을 지시했으니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 강점기 동안 지주의 수탈 아래 신음했던 농민들이 농지개혁으로 자기 땅을 갖게 되자, 기쁜 마음으로 밤낮없이 농사를 지었고 거기서 생기는 소득을 열심히 저축해서 자녀 교육에 투자했다. 해방 이후 유례없는 고도성장의 주체는 그들에게서 나왔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평등한 토지권의 이상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공업화와 도시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면서 도시 토지의 가격 상승이 이어졌고 이를 활용해서 불로소득을 얻는 투기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민첩한 몇 사람이 토지 투기로 큰돈을 버는 것을 지켜본 사람들이 너도나도 투기에 뛰어들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열심히 노동해서 소득을 얻고 그것을 저축해서 자산을 형성하려고 노력하던 사람들이 점차 땀 흘려 벌어들이는 소득을 가볍게 여기고 투기로 얻는 불로소득에 마음을 쏟는 변화가 일어났다. 이는 바로 ‘지대추구 사회’(Rent-seeking society)의 형성과정이었다. 
많은 사람이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는 최대 요인은 부동산문제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초래된 근본 원인을 정확히 인식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마디로 말해 부동산문제의 근본 원인은 헌법의 토지공개념 정신과 실제 부동산 제도 사이의 괴리가 크다는 사실에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수십 년을 지내 오는 사이에, 한국 사회에서는 여러 차례 부동산 투기 광풍이 불었고 부동산 불로소득으로 인한 불평등과 양극화가 갈수록 심해졌다. 이미 한국은 토마 피케티가 말하는 세습자본주의 단계에 들어섰다고 보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정치인이나 관료들도 이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도 선뜻 문제 해결에 나서지 못하는 것은 헌법의 지지가 약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서울 아파트 시장의 투기 광풍을 잠재우지 못한 것도 근본적인 대책 마련에 따를 저항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현행 헌법의 토지공개념 조항을 보다 구체적이고 확실하게 수정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성서의 희년법을 아는 기독교인이라면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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