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마다 전교생이 함께 드리는 예배에 초대된 적이 있다 말씀드렸지요. 그 예배 중에 부른 찬송이 있습니다. 곡조도 가사도 마음에 다가와 신바람 나게 부른 기억이 있습니다. 채희동, 이현주 목사님이 가사를 지으시고 이재민 선생님이 곡을 붙인 찬송입니다.

 

밥을 먹는 자식에게

천천히 씹어서 공손히 삼켜라. 봄부터 여름 지나 가을까지 

그 여러 날들을 비바람 땡볕 속에 익어온 쌀인데

그렇게 허겁지겁 먹어버리면 어느 틈에 고마운 마음 들겠느냐

사람이 고마운 줄을 모르면 그게 사람이 아닌 거여

 

주님을 모시듯 밥을 먹어라. 햇빛과 물과 바람 농부까지 그 많은 생명

신령하게 깃들어 있는 밥인데 그렇게 남기고 버려버리면 

생명이신 주님을 버리는 것이니라 사람이 소중히 밥을 대하면 

그게 예수 잘 믿는 거여

밥 되신 예수처럼 밥 되어 살거라. 쌀 보리 밀 옥수수 물고기에 온 만물들은

자신을 제단 위에 밥으로 드리는데 그렇게 사람들만 밥 되지 않으면

어느 누가 생명 세상을 열겠느냐 사람은 생명의 밥을 먹고 밥이 되어 사는 거여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단지 살기 위해 또는 맛으로만 섭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곳은 힘써 알려줍니다. 음식을 그저 영양 따지고 맛을 따지는 것에 그쳐선 안 된다고 말이지요. 나를 살게 하는 뭇 생명의 소중함과 그 생명의 삶을 온전히 내 안으로 모시는 것이니 얼마나 경건한 일이냐며 되묻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와 한가지로 연결됩니다. 내가 먹는 것이 생명이며, 그 생명이 곧 나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생명이 생명답게 살다가 자기에게까지 와준 생명을 정성껏 모십니다. 그 행위 자체로 사람들의 정성과 땀과 수고를 깨닫고 온 생명과 연결되어 있음을 체감합니다. 그러한 감응이 자신들이 살아가는 삶에서도 연결되길 바라면서 말이지요. 그러한 바람 속에서야말로 세상이 주입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배움터, 울타리를 넘어서

   그곳은 교문이 따로 없습니다. 그저 입구에 길게 늘어선 은행나무가 늠름하게 안내를 맡아 교정으로 이끕니다. 코로나19로 온 세상이 몸살을 앓기 바로 전에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의 안내를 받아 교정에 들어섰습니다. 한창 학교 축제가 진행 중입니다. 말이 학교 축제지 마을 축제와 다름없습니다. 교정엔 하도 사람이 많아서 누가 학교 사람이고 마을 사람인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대개 학교란 곳은 마을에 누가 사는지, 마을이 어떻게 생겼는지, 마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그다지 관심 없습니다. 학교의 교육과정도 중앙 교육부처에서 구성되는 것을 따르며 대부분 지역 마을의 특성과는 무관하게 진행됩니다. 교사들과 운영체계, 교과과정은 마을이나 지역과 상관없이 중앙으로부터 하달된 내용으로 이루어진 지 오래되었지요. 그래서 학교는 마을 안에 있는 ‘섬’과도 같습니다. 

   이렇게 섬처럼 스스로 고립되어버리는 학교의 성격에서 벗어나고자 그곳은 울타리를 넘어서 지난 십여 년 동안 경험하고 익혀온 뜻깊은 지혜들을 마을과 공유하려 노력합니다. 교사와 아이, 학부모들 역시 마을의 주민들과 더불어 배움의 공동체로 일구어 살아가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그곳이 지향하는 교육의 장은 ‘예수마을(영성공동체)’입니다. 공동체라는 말이 약간의 추상성을 담고 있다면, 마을은 좀 더 구체적이고 실천적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곳이 중심이 되어 영성, 생명, 교육이 어우러지는 마을을 꿈꾸고 있습니다. 배움은 학교의 울타리를 넘어 마을을 향하고, 마을은 영성공동체 곧 하나님 나라를 향합니다. 

   그곳은 입학식에서부터 아이들을 마을과 연결하려고 시도합니다. 입학식에서 이루어지는 ‘동네 한바퀴’라는 의식을 통해 신입생과 신입생 학부모, 더불어 전교생이 함께 마을을 걷습니다. 마을에 신입생들이 들어왔음을 알리고, 신입생들은 자기들이 살아갈 새로운 동네를 돌아봅니다. 그렇게 그곳이 마을 안에 있음을 아이들에게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곳의 아이들은 잠잠히 봉사하는 일로 마을에 다가갑니다. 마을 내 장애인 시설이나 도움이 필요한 곳을 방문하여 봉사하고, 수업에서 마을 생태계를 조사하거나 마을 지도를 만들기도 하며, 노인회를 방문하여 농사와 관련된 오래된 지혜를 배웁니다.

   학생들만이 아니라 그곳의 학부모들도 마을을 위한 봉사를 펼쳐가고 있습니다. 한꺼번에 몰아치지 않고 한결같이란 뜻을 지닌 느루모임은 그곳의 학부모들이 중심이 된 봉사 모임입니다. 달에 한번은 정기적으로, 또 필요시에는 언제나 출동하여 낡은 것을 수리하여 새것으로 업사이클링 하는 고마운 모임이지요. 학교 시설을 보수하는 일을 주로 하지만, 지역 내 도움이 필요한 곳에는 그곳의 이름으로 찾아가 한결같은 도움의 손길을 펼치기도 합니다. 학부모님들의 자발적 봉사는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향기를 퍼뜨리는 일입니다.

   그곳이 마을과 함께 협력하여 진행하는 가장 큰 행사로 ‘반딧불이 축제’가 있습니다. 그곳이 있는 지역은 반딧불이가 사는 청정구역입니다. 이를 보존하기 위해 매년 반딧불이 보존 행사를 열어가고 있습니다. 연 2천여 명이 참석하는 큰 행사가 되었는데, 지역 노인회의 주력 사업이 되었다고 합니다.

 

   문턱 없는 배움터

   그곳이 실천하려는 마을교육의 일차적 대상은 지역의 학교 밖 청소년이나 경제소외층 청소년입니다. 이들은 사실 그곳의 교육을 가장 필요로 하는 아이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사회적 경제적 이유로 교육적 돌봄에서 배제된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따라서 그곳은 지역아동센터와 의미 있는 교육을 해나가기 위하여 협력을 모색합니다. 현재 각 지역 곳곳에서 기초 복지를 담당하는 지역아동센터는 학업의 연장선에서 2급 학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지역아동센터의 역할을 낮잡아 보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지역아동센터의 물적, 인적 토대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학원들보다는 약하는 것의 표현입니다. 대부분 지역아동센터는 자원봉사로 교사의 역할을 해나갑니다. 그 가운데서 전문성이나 일관성이 담보되지 않아 많은 어려움에 처해 있다고 합니다. 그곳은 그동안의 교육내용 및 방법을 공유하며 지역아동센터가 생명, 영성, 대안교육의 장으로, 마을교육복지의 장으로 전환되도록 여러 시도와 실험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마을의 아이들도 생명과 영성을 마음에 품으면서, 자기발견의 에니어그램과 예수마음영성을 접할 것입니다. 또한 교실과 가정에서 잘 듣고 자기표현을 잘하는 의사소통을 배울 것이고, 서로의 의견을 합의하고 결정하는 평화교육을 익혀갈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예수를 모르거나 예수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예수의 영성과 정신을 소개하고 접하게 하는 중요한 연결점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곳에서 진행되는 마을교육은 일반학교에 자녀를 보내는 학부모들과 교육의 의미를 물으며, 건강한 학교, 건강한 교육을 찾아가는 기회를 공유하려는 노력의 일환입니다.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은 어떠한지, 우리 아이들의 교육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등을 공부하는 대안교육 공부모임을 마을에서 꾸릴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더 나아가 마을의 일반주민들에게 생활정치교육, 생활영성교육 등의 필요를 공유할 것입니다. 비록 우리나라가 절차적 형식적 민주주의는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생활의 영역에서 민주주의적 삶의 습속이 아직 정착되지 못했습니다. 이를 위해 인권의 이해, 헌법의 정신, 공공영역에서의 합리적 의사소통, 주민자치와 주민참여, 노동의 권리, 시장과 광고, 언론 미디어 등을 공부할 수 있도록 그곳은 부지런히 여러 방면으로 모색을 시도합니다. 이러한 노력은 우리나라를 민주적 시민사회로 이루어 가는데 기여하는 중요한 걸음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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